환영과 아름다움





『국가』 제 10권에서 나타난 논의 요약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에서는 제 10권의 상반 부분을 할애하여, 시(詩)와 관련된 ‘모방(模倣)’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라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논의를 진행하던 와중에 플라톤은 ‘시(詩作, 시 짓기: poiēsis)’를 꺼내들며, 자신이 얼마나 호메로스와 같은 비극 시인들과 다른 모방자들을 존경하는지 오해하지 말라는 문장으로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스테파누스 쪽수 595a-c).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들, 예를 들어 침상이나 가구의 이데아가 있다고 가정할 때에 그것을 형상으로 구현해내는 장인, 제작자 등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를 구한다(595c). 그러자 플라톤은 이 모든 것을 별 다른 노력 없이 만드는 자들이 있는데, 마치 거울을 들고 다니며 보이는 것들을 비추는 것 처럼, 진실로 있는 것에는 다가가지 못하는 ‘화가’, ‘모방자’들이 그러한 제작자의 일종이라 말한다(595c-597b). 플라톤은 이 개념과 관련하여 세 가지 ‘침상’의 구분을 예로 든다. 본질에 있어서 침상인 것과 목수가 만드는 침상, 그리고 화가가 만드는 침상 이렇게 세 가지가 있듯, 참으로 그것인 상태, 즉 이데아에서 모방자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597b-598b). 

보이는 현상을 모방하는 영상은 그 어느 것에도 정통하지 못할 뿐더러, 아이들이나 무지한 사람들의 분별력을 흐려놓으며, 호메로스와 같은 비극 시인들의 작품은 실재로 역사에 남긴 업적이 아닌 사건들을 기술하기 때문에 아무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598b-601a). 시인들이 낱말을 구성하는 데에는 일종의 마력 같은 것이 있어서 흥미로워 보일 뿐이다(601a-b). 영상 제작자들은 가죽 재단사나 대장장이들이 말타는 사람을 위해 만드는 도구 제작 기술을 알지 못하며, 단지 그 형상을 모방할 뿐 그것에 대한 옳바른 의견이나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므로 무지하다(601c-602b). 

이러한 모방 행위는 인간의 시각(視覺)과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602c). 우리의 혼은 마법이나 요술에 혼란을 겪음이 필연적이며, 많은 의견의 분쟁을 겪음이 불가피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일깨워 혼의 최선의 상태를 만족시켜줘야 한다(602c-603d). 훌륭한 사람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603e-605a). 모방적인 시인과, 화가는 나쁜 ‘통치 체제’로 유도하는 영상들을 제작하기 때문에 나라에 해로운 존재이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꺼리낌이 없다(605b-606d).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이 아무리 으뜸 가더라도 결국 이 나라에서 추방당하는 일은 불가피하며 전체를 위해 이로운 일이다(606e-608b). 




플라톤의 모방론

플라톤이 제시한 모방론은 감히 미학의 선구자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양미술사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내용이다. 사실상 서양 미학의 시작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플라톤의 이론은 잘 알려지다시피  현실 세계를 이데아의 그림자, 즉 이데아를 모방하는 한 차원 낮은 단계의 상태라고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데아는 현실에서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플라톤은 이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유의미한 일이라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라톤은 회화, 즉 ‘모방(mimēsis)’이 기만적인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플라톤이 이토록 모방을 경멸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바로 그 첫 번째가 ‘진리(alētheia)’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실재(to on)’, 즉 이데아와 신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노력은 바로 ‘실재와 같은 그런것(toiouton)’을 만들어내려는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은 곧 ‘보이는 현상(phantasma)’가 되며, 그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손재주꾼(cheirotechnēs)’, ‘장인(제작자, dēmiourgos)’이라 일컫어지는 사람들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들의 노력은 가히 인정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무지의 ‘동굴(spēlaion)’에 갇힌 사람이 진리에 눈을 뜨는 과정에서도 물 그림자라는 ‘상(eidōlon)’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피하므로, 이 또한 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현상을 모방하는 일이다. 이는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들(phainomena)’을 포장하는 일이며 참됨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다. 

“그러니 이 모방 행위(mimeisthai)는 단연코 진리에서 세번째인 것에 관한 것일세. 아니 그런가?”


다시 동굴의 비유를 들어 표현하자면 모방은 예지계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그림자와 인형들이 있는 동굴로 퇴행하는 일인 것이다. 실재에 대하여 알지 못함, 즉 무지(無知)는 플라톤에게 곧 ‘죄’이다. 플라톤의 기준으로 이와 같은 무지의 죄를 행하는 사람들에는 ‘시(poiēsis)’를 짓는 사람, 화가, ‘모방자(mimētēs)’, ‘비극작가(tragōdopoios)’, ‘영상(eidōlon)’을 만드는 자 등이 있다. 




플라톤이 모방을 용납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비이성적이고 인간의 분별력을 흐리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평면적인 공간에 입체를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일인데다가 환시를 일으키는 터무니없는 황당한 일이다. 그는 이를 ‘음영 화법’, ‘요술’, ‘마법’이라 표현하였으며 시각적 착시를 일으키는 해로운 것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것보다 인간이 더더욱 정진해야 할 것은 수학(數學)이다. ‘측정하는 것(metrein)’, ‘계산하는 것(arithmein)’, ‘계량하는 것(histanai)’ 등, 혼에 있어서 최선의 부분, 즉 이성을 함양하는 일 말이다. 

분명 플라톤도 능동적인 인식이 결코 물리적 시각 능력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태양을 언급하며 태양의 부재 상태, 즉 어둠의 상태일 때 눈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혼의 경우도 이렇게 생각해 보게. 진리(alētheia)와 실재가 비추는 곳, 이곳에 혼이 고착할 때는, 이를 지성에 의해 대뜸 알고 인식하게 되어,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중략)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dynamis)을 주는 것을 ‘좋음(善)의 이데아’라고 선언하게.” 

그러나 플라톤은 이 ‘힘’에 주목하면서 감각계에서 인식되는 가시성의 영역(‘[눈에] 보이는 부류’, to horōmenon)과 지성의 영역(‘지성에 알려지는 부류’, to nooumenon genos)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였고,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모든 감각의 대상들을 저하시켰다는 것에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여전히 동굴 메타포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The Symposium', by Anselm Feuerbach (1871)



플라톤의 한계와 현대 회화

그렇다면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믿지 않았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플라톤은 참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으며, 오히려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판단되지 않는 형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한계는 이러한 참된 아름다움이 일반적 의미에서의 ‘예술’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다음은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이 나눈 대화를 발췌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전제되었으니, 내가 말함세. ‘아름다운 것(아름다움) 자체’(auto kallos)라든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美) 자체(auto kallos)의 그 어떤 ‘본모습’(이데아)도 전혀 믿지 않으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사물)’(polla ta kala)은 믿는 고지식한 사람, 누군가가 ‘아름다움’은 ‘하나’(hen)이며 ‘올바름’도 ‘하나’이고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는 저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더러 내게 말하게 하고 대답하게 하라고 말일세. 우리는 그에게 물어볼 걸세. ‘여보시오. 아름다운 사물 가운데 추해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습니까? 또한 올바른 것들 중에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그리고 또 신성한(경건한) 것들 중에서 신성하지(경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라고 말일세.” “그런 건 없습니다. 이것들은 어느 면에서는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추하게 보이는 게 필연적입니다. 선생님께서 물으신 그 밖의 다른 일체의 것도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의 세계관만큼이나 서로 다른 미학 이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모방의 인지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역설하는 입장이었다.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인간이 모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서양 고대 철학의 타협점을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적인 활동이며 이를 통해 ‘모방 그 자체’를 인지하는 배움이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시학(Peri Poitikes)』에서 시가 지닌 합리적 법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는데, 시학이 지닌 비극의 카타르시스와 회화를 같은 연장선에 두고 논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존재이며, 모방 또한 인간의 인지 능력이 투입되는 이성적인 활동인 것이다. 

'A Burial at Ornans', by Gustave Courbet (1850)


아리스토텔레스가 수 천년 후를 예언했던 것일까. 19세기에 이르러 서양미술사는 사실주의(realism)를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시대와는 다르게 정의하고자 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기 시작한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회화 아카데미가 고수해왔던 가치들을 가감없이 벗어던졌으며, 웅장한 모습으로 포장된 권력과 신화에 신랄한 풍자를 던지기 시작하였다. 새까만 물감 덩어리로 점철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오르낭의 매장>(1849)부터 현대미술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금지된 재현>(1937)까지, 인간은 죽음과 삶, 현실과 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실험적인 활동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Not to be Reproduced', René Magritte (1937)


따라서 내가 갖게 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플라톤의 예술관이 갖는 의의를 현대로 가져와서 논하는 것이 유의미한 일인가? 현대의 추상회화는 더이상 기술(테크네)과 그다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아가 현대의 도식(scheme)에 끼운 플라톤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 굉장한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수 천년 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늘날 예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범위에서 잦게 언급됨에도 그 판단에 있어 매우 난해한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부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소크라테스의 말이 생각의 불씨가 되었다. 어쩌면 플라톤은 이토록 판단에 있어서 대립되는 여러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취약점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모방이 야기할 혼란을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은 같은 마음의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시각(視覺)과 관련해서 분쟁을 치루며 동일한 것들에 대해서 자신 안에 반대되는 의견(판단)들을 동시에 가졌듯, 마찬가지로 행위들의 경우에도 스스로 저 자신과 분쟁을 치루며 싸움을 하게 되는가?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가 합의를 볼 필요는 전혀 없다네. 앞에서 한 논의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충분히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지. 우리의 혼이 동시에 대립되는 이런 만 가지의 것으로 가득하다고 말일세.”


'The Treachery of Images', by René Magritte (1929)


현대 회화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1929)이라는 작품이 있다. 파이프가 그려진 이 그림의 아랫 부분엔 그림이 명시하는 바와는 역설적이게도 “ceci ne pas une pipe”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번역하자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 자체는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즉, 플라톤이 그토록 혐오한 모방 행위를 통해 모방의 역설을 전달하는 역할을 도맡는 것이다. 

진중권이 그의 저서 『이미지 인문학 1』에서 언급한 작가 한성필의 <사진적 데칼코마니 대 회화적 데칼코마니>(2007)도 비슷한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 작품은 두 가지 창문으로 구성된다. 하나에는 진짜 조명이 드리워져 있고, 나머지 하나는 붓으로 그린 빛이다. 

진중권은 그의 작품과 관련하여 “회화적 가상을 슬쩍 현실의 피사체로 행세한다. 이런 전략을 작가는 재현再現과 구별하여 ‘제현’製現이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마그리트와 한성필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진짜와 가짜, 실재와 가상을 구별하는 것 자체에 관한 일종의 유희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원본과 가품을 구별짓고자 하는 전통 미술의 권위주의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작가도 있다.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바로 그 예이다. 

사진적 데칼코마니(좌), 회화적 데칼코마니(우), 한성필 (2007)


이처럼 시대가 흘러 회화는 시각적 분별을 넘어서는 의의를 갖게 되었음에 분명하다. 존 버거John Berger는 그의 저서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 《세케르 아흐메드와 숲》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하이데거가 『사고에 대한 담론』에 담은 “사고에 대해 시골길에서 나눈 대화”를 언급한다. 

버거는 <숲 속의 나무꾼>이라는 세케르 아흐메드의 그림 작품으로부터 비롯된 공간의 기묘한 모호성과 관련된 시각적 ‘설득력’을 논하고자 하였고, 공간의 회화적 표현과 이야기의 내러티브 간에 얼마나 밀접한 대응 관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펼치던 중 다음과 같은 하이데거의 인용을 제시하였다. 

교사: ...... 지평선을 그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을 이제까지 전혀 마주친 적이 없었습니다.
과학자: 선생께서는 이 진술에서 어떤 것을 마음에 두고 계신가요? 
교사: 우리는 우리가 지평선을 들여다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야라는 것은 열려 있는 어떤 것이 되겠지만, 그것의 열려져 있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다는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문학자: 마치 우리가, 시야 속에 들어오는 풍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대상물들의 외양을 이 열려져 있음 속에 놓지 않는 것처럼 말이군요......


버거는 이 글을 통해 시각적 인지라는 것이 단순히 망막에 맺히는 물리적 현상과 행위가 아닌, 그 이상의 고차원적인 인간 사고가 결부된 일이라 말하고자 한다. 여기엔 필연적으로 한 인간이 놓이는 사회, 문화적인 상황이 관여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인지 개념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구름 속에 들어 있는 형상

E. H. 곰브리치E. H. Gombrich는 『예술과 환영』에서 필로스트라투스가 쓴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의 대화를 언급한다. 대화의 내용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현자인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와 그의 제자 다미스가 구름을 보며 회화적 미메시스를 논의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곰브리치는 이 대화를 통해, “이런 예기치 않은 형태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어내는가 하는 것은, 그것들 속에서 우리가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있던 어떤 사물이나 이미지의 모습을 확인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곰브리치에게 ‘보는 이’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눈속임 기법을 이용한 아이슬란드 도시의 횡단보도(work by Vegmálun GÍH).

플라톤이 그토록 혐오한 눈속임은 그 패러독스 자체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미술 기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 우리는 ‘트롱페이유(trompe-lœil)’라고 부르며, 이는 관람의 대상이 되는 객체와 관람자라는 주체의 권력싸움을 즐기는 일종의 유희로 대표된다. 여기에서 ‘보는 이’는 우위에 서있다. 그러나 21세기에 진입하면서부터 그 우위가 늘 고정되어 있으리라는 보장이 꼭 유효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오늘날 현대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어딘가 모르게 그 우위 체계를 위협하는 상황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4D 영화와 로봇 기술이다. 우위를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되는 감정의 경계, 인간이 가상과 현실에 놓여있을 때 느끼게 되는 어딘가 으스스하고도 섬뜩한 이 감정의 골짜기를 ‘언캐니밸리(uncanny vally)’라고 한다. 이는 일본의 로봇공학자인 모리 마사히로森政弘에 의해 1970년도에 대중화된 용어로써, 기원을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른스트 옌치Ernst Anton Jentsch의 논문 『On the Psychology of the Uncanny』(1906)에 두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곰브리치가 1960년에 저술한 『예술과 환영』에서 1823년 신고전주의 평론가 콰트레메르 드 퀸시Quatremère de Quincy의 주장을 언급하며 이 아슬아슬한 경계에 대해 이미 기술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환영 속에서 느끼는 기쁨은 바로 예술과 실재(reality) 간의 차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인간 마음의 노력에 있다고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즐거움은 그 환영이 너무 완벽할 경우 파괴된다.” 

이 시점부터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되고, 대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 곰브리치의 주장은 다시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돌아가 ‘이미지 만들기(image making)’와 ’이미지 읽기(image reading)’에 머무르게 되지만, 오늘날에도 이 논점이 또다른 국면에 들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시사하는 것을 보면 영 고지식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백상현은 그의 저서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작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감상자)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것(작품)은 당신들의 세계가 붕괴하는 지점, 혹은 초과하는 어떤 지점의 ‘이미지’라고. 이것은 당신들의 사유가 이미 주어진 아름다움에 관한 지식을 반복하는 행위를 정지시킬 때에만 보이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며, 혹은 그러한 정지를 가능하게 하는 악마적 매혹이라고. 따라서 감상자인 우리는 유혹하는 유령이미지로서의 작품 앞에서 일종의 기로에 선다. 우리를 잠시 매혹시켰던 이것,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이미지로서의 이것을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단지 미술사에서 흔하디흔한 일탈적 해프닝, 치기 어린 반항의 장난으로 무시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모방을 환시의 범주에 포함시켰던 것은 아마 그 위험도가 환각의 정도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을테고, 가상과 실재를 구분짓기 어려워 하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당혹스러움은 아마 플라톤이 우려했던 것과 비슷한 연장선에서 생성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논의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백상현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불안한 예술작품’과 ‘어린 반항의 장난’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인간의 공포가 등장한다. 플라톤이 혐오했던 몽상주의자들의 초현실주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로 성큼 들어와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릴 겨를도 없이 우리의 인생에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영상(映像)의 성격을 가져와 우리가 보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 드러내야 할 과제의 일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이데거가 다리(wood bridge)의 존재로 비로소 강(river)이 드러난다고 말했듯, 우리의 생각이 일상에서 벗어날 때에서야 성찰이 가능함을 상기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내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가상의 다리가 될 것인가, 혹은 알 수 없는 다른 세계에 휘말리도록 하는 미끼가 될 것인가? 







2016.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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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Plato(Πλάτων), 428/427 혹은 424/423–348/347 BC
플라톤, 『국가, 政體』, 서광사, 1997, p. 628(602c)
플라톤, 『국가, 政體』, 서광사, 1997, p. 437(508d-e)
Socrates(Σωκράτης), 470/469–399 BC
Glaucon(Γλαύκων), c. 445 BC–4th cen. BC
플라톤, 『국가, 政體』, 서광사, 1997, p. 378-379(479a-b)
플라톤, 『국가, 政體』, 서광사, 1997, p. 630-631(603d)
진중권, 『이미지 인문학 1, 천년의 상상, 2014, p. 78
버거, 『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2000, p. 125-126. 재인용.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열화당, 2003, p. 185
E. H.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열화당, 2003, p. 266
백상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책세상, 2014,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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