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어떤 존재로 사유되는가
Fuck Content
마이클 락Michael Rock은 <Designer as Author>에서 디자이너인 우리가 스스로의 작업에 자신이 없으며, 디자이너들이 예술가나 작가들의 사회적인 힘, 지위,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된 자신감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에서인지 디자이너들은 늘 콘텐츠*의 ‘출처’에 강박적인 태도를 보였다. 디자이너는 단순히 제작자가 아닌 콘텐츠 생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끊임없이 받는다. 사람들이 갖는 오해 중의 하나가 깊은 내용의 콘텐츠가 없으면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히치콕 영화’로 만드는 것은 그 각각의 내용이 아니라 그의 영화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스타일의 일관성이듯, 작업의 진정한 의미는 스토리가 아닌 스토리텔링에 있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스토리텔링에서 타협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콘텐츠의 내러티브에 정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방식, 말하는 도구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 그 도구는 타이포그래피, 선, 형태, 색상, 대비, 크기, 무게 등이다.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는 콘텐츠가 아닌 형태의 변모로 이야기되어 왔다. 그리고 그 역사는 렌더링의 속도처럼 굉장히 빠르게 변해왔다.
각각의 작업물들, 프로젝트들은 굉장히 제한적이어서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반영할 수 없다. 다만 디자이너들은 일련의 작업들이 연결된 관계 속에서 자신을 표출한다. 그 관계성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이다. 그 관계 속 요소들이 재구성되고 렌더링되는 일은 나아가 철학을 드러내고 미학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증과 비평이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 사람과 세상을 잇는 하나의 매개체가 디자인이다. 우리의 콘텐츠는,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디자인 그 자체이다.
각각의 작업물들, 프로젝트들은 굉장히 제한적이어서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반영할 수 없다. 다만 디자이너들은 일련의 작업들이 연결된 관계 속에서 자신을 표출한다. 그 관계성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이다. 그 관계 속 요소들이 재구성되고 렌더링되는 일은 나아가 철학을 드러내고 미학을 구현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증과 비평이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 사람과 세상을 잇는 하나의 매개체가 디자인이다. 우리의 콘텐츠는,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디자인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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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콘텐츠'는 한국식 표현이며, 본래 영문에서 ‘내용’을 의미하는 ‘content’가 복수형으로 표기된 ‘contents’의 잘못이다. 단수형은 의미나 내용과 같은 추상적인 것을, 복수형은 구체적인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상 단수형을 쓰는 것이 정확하나, 이미 한국에서 콘텐츠로 통용되므로 이와 같이 표기한다.
The Designer as Producer
엘렌 럽튼Ellen Lupton은 작가로서의 디자이너designer as author를 논하기 보단 제작자로서의 디자이너designer as producer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행위인 ‘제작’을 도입하는 것이다. 제작의 개념은 모더니즘의 역사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대량생산 기술을 중립적 의미에서의 ‘기술’로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독일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Author as Producer’라는 글을 통해 작가성이라는 개념이 문학에 편중된 상태로 관습화 되어있음을 비판하고, 라디오, 광고, 신문, 언론 등의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나타나게 되어 기존의 경계들을 허물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던 벤야민은 생산 수단을 인간 문화의 핵심이라고 여기고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예술가들은 단지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하고자 하는 내용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배포하는 방식으로서의 생산 혁명을 이루어내야 한다. 이렇듯 벤야민은 작가와 출판자, 작가와 독자, 신인과 대중인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다리를 놓는 일이 혁명으로 불릴만한 것으로 간주했다.
독일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Author as Producer’라는 글을 통해 작가성이라는 개념이 문학에 편중된 상태로 관습화 되어있음을 비판하고, 라디오, 광고, 신문, 언론 등의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나타나게 되어 기존의 경계들을 허물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던 벤야민은 생산 수단을 인간 문화의 핵심이라고 여기고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예술가들은 단지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하고자 하는 내용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배포하는 방식으로서의 생산 혁명을 이루어내야 한다. 이렇듯 벤야민은 작가와 출판자, 작가와 독자, 신인과 대중인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다리를 놓는 일이 혁명으로 불릴만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벤야민의 제안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디자이너들의 컴퓨터 속에는 모든 도구들이 소프트웨어의 형태로 들어가 있다. 툴의 보편화로 디자인의 확장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업무량이 늘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한 제작자는 공장에서 기계를 돌려 부품으로 작용하는 노동자가 되라는 뜻과는 다르다. 디자이너는 기술을 통달하는 전문가가 되어야지, 그것에 얽매이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디자이너의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는, 벤야민이 역설했듯, 독자 혹은 관람자를 의미 생성 과정의 ‘협력자’collaborators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작가’라는 단어는 텍스트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문화적인 권위를 가진다. 다만 디자이너들이 유려한 문장력을 지닐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주요 분야에 대한 통탈—전문적인 사진작가 혹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제작자로서의 디자이너는 의사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고, 기술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콘텐츠를 연출해야 한다.
디자이너의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는, 벤야민이 역설했듯, 독자 혹은 관람자를 의미 생성 과정의 ‘협력자’collaborators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작가’라는 단어는 텍스트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문화적인 권위를 가진다. 다만 디자이너들이 유려한 문장력을 지닐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주요 분야에 대한 통탈—전문적인 사진작가 혹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제작자로서의 디자이너는 의사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를 지향하고, 기술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콘텐츠를 연출해야 한다.
디자이너의 역할
화가, 즉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차이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시절이 한때 있었다. 그때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세계’의 차이였다. 나에게 예술가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다가왔고 디자이너는 시장이라는 현실 속 세계를 반영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계는 그람시식으로 표현하자면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싸움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플라톤식으로 ‘이데아’의 구현일 수도 있다. 여전히 내리기 어려운 결론이다.
마이클 락과 엘렌 럽튼 또한 공통적으로,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관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렵다. 디자인이 다른 유사 실천적 행위와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듯하지만 실로 굉장히 어려운 수수께끼 같다.
마이클 락과 엘렌 럽튼 또한 공통적으로,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디자이너의 역할은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관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렵다. 디자인이 다른 유사 실천적 행위와 구별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듯하지만 실로 굉장히 어려운 수수께끼 같다.
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지속되어온 트렌드는 디자이너에게 굉장히 많은 것들을 요구해왔다. 콘텐츠를 구상하는 기획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물로 구현하는 작업자는 물론이고 판매의 아이디어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마이클 락은 이러한 콘텐츠 강박에 시달리는 디자이너들에게 말한다. “Fuck contents!”. 그는 어쩌면 디자이너가 디자인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일종의 철학에 준하는 깊이를 구현하려면 해당 디자이너의 일생에 거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프로젝트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양식’, 즉 스타일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엘렌 렙튼이 말하는 디자이너의 역할은 맥락 상 마이클 락이 말하는 것과 조금은 다르다. 그녀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쓴 발터 벤야민을 들어 설명했다. 벤야민은 기술의 발전이 예술과 문화계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많았고, 그 생산 수단을 전적으로 예술가 집단—나아가 일반 대중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기술)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확산에 이용되었던 과거 참혹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기술의 대중화는 반드시 이뤄져야 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엘렌 렙튼에게 디자인이란 세상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보인다. 이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것,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인 것이다. 마이클 락이 보다 미시적 의미에서의 디자인 분야를 논하고 있다면, 엘렌 렙튼은 광범위한, 거시적 관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녀의 생각에 따르면 기획을 하고 지시를 내리고 표현하는 여러 행위의 주체자는 결국 모두 디자이너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엘렌 렙튼에게 디자인이란 세상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보인다. 이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것, 그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인 것이다. 마이클 락이 보다 미시적 의미에서의 디자인 분야를 논하고 있다면, 엘렌 렙튼은 광범위한, 거시적 관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녀의 생각에 따르면 기획을 하고 지시를 내리고 표현하는 여러 행위의 주체자는 결국 모두 디자이너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중립적인 디자인은 없다
나는 디자인이 연설과 작문에 버금가는 구체적 실천 행위라고 믿는다. 콘텐츠content, 즉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그 매개체container가 그 의미와 무관할 수는 없다고 본다. 내가 중립적인 디자인이 없다고 믿는 이유이다. 우선 엘렌 렙튼이 표현한 것 처럼, 디자이너가 주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임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마이클 락이 강조하는 지점 또한 유심히 고민해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디자이너에게 부여된 업무량은 그것의 수행에 있어서 촌각을 다툴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매순간 정치적인 영향력을 사유하고 사회적 방향성을 깊게 고려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물론 최소한의 신념, 무의식에서부터 작동되는 디자인 철학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마이클 락이 말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마이클 락이 강조하는 지점 또한 유심히 고민해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디자이너에게 부여된 업무량은 그것의 수행에 있어서 촌각을 다툴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매순간 정치적인 영향력을 사유하고 사회적 방향성을 깊게 고려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물론 최소한의 신념, 무의식에서부터 작동되는 디자인 철학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마이클 락이 말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여전히 고민 중에 있다. 늘 그래왔듯이 디자인이 예술의 범주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하는 끝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미학적 논증과는 별개로 대기업 대량 생산의 시대 속에서 (벤야민이 말했듯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불가하도록, 고착화되고 있는) 철저한 계급적 사회는 견고하기만 하다. 오늘날의 부르주아는 클라이언트이고 프롤레타리아는 디자이너이다. 디자인이 궁극적으로 시장으로부터, 상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벗어나야 하는가, 어떠한 이유로 벗어나야 하는가—에 관한 의문은 사유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
2017.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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