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아메리카나 신화와 대한민국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김준형, 2008)은 국제외교에서의 미국의 절대적 위치에 의문을 갖고, 불투명해진 미국의 앞날, 세계 정치의 방향성을 조명하고자 하는 책이다.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미국은 절대적인 패권을 얻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 

견고했던 양극 균형 체제가 깨어지고 단일한 국가가 세계의 패권을 재패하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을, 극대화된 패권으로 억누를 것인가, 혹은 국제기구로 상징되는 다자협력체제로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앞날을 조명하기에 앞서 역사적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서 미국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세계의 경찰 미국의 아이러니


미국이 세계의 경찰로 불리우는 데에는 비교적 의문이 없어보인다. 다만 ‘어떤’ 경찰인지에 대한 묘사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때로는 세계대전에서 지구를 구원한 영웅으로, 때로는 자본주의가 낳은 포악한 괴물로 묘사되곤 한다. 미국은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시스템을 거쳐 패권을 거머쥐었다. 

혼란한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고 미국의 이익대로 판을 짜는 데에 어떤 전략들이 사용되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은 세계 경찰의 입지를 견고히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의 답에 도달하고자 세계대전 전후 미국의 모순된 모습을 살펴보려고 한다. 

미국의 첫 번째 아이러니는 동유럽 국가에 대한 태도이다. 미국이 1차, 2차 세계대전 때처럼 약소국을 대변해 싸움에 뛰어들고 세계를 구하려고 했다면, 냉전 체제에서도 왜 똑같이 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치의 악행을 담습한, 소련에 의해 피해를 입은 동유럽 국가들이  여전히 잔인하게 짓밟혔지만, 세계의 경찰 미국은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관할 지역의 경계선 자체를 미국이 주도해 그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다. 미국은 유럽을 동서로 나누었으며,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장본인이다. 이 사실을 통해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만을 잣대 삼아 세계대전 이후의 지도를 마음대로 구성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미국의 아이러니는 기존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고, 자본주의라는 정복의 깃발을 꽂았다는 것에 있다. 그 결과 미국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친미주의 정부를 각국에 세울 수 있었으며, 한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정복해가고, 자본주의 시장 체제의 소프트파워 도입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장악해버린 것이다. 과거 제국주의가 칼과 총에 의한 착취였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간접적이었지만 더욱더 깊이 스며들 수 있는 고도의 발명품이었다. 

미국의 세 번째 아이러니는 소련과의 공생에 있다. 주요 전장지였던 소련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막대한 상황이었다. 태평양을 중간에 두고 전장과 떨어져있는 미국은 사정이 달랐고, 오히려 군수품의 수급으로 유럽으로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다. 그러한 소련을 초 강대국으로 치켜세운 것은 오히려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빈약하지만 핵무기로 위장한 소련을 절대악으로 두게 됨에 따라 유럽, 아시아를 비롯한 제 3세계 국가들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판형을 짠 것은 결국 미국이다. 소련 또한 미국과의 대치 상태로 국내 정치를 견고히하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동유럽에 대한 약탈을 합리화했지만, 결국 가장 큰 이득을 챙긴 것은 미국인 셈이다.




냉전을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해보자. 소련이 실제로 미국과 비등한 힘을 갖추고 있었는지에 대한 관점도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은 소련이 미국에 대항할만큼 큰 힘을 갖지 못했으며, 냉전의 상황은 과장되었다고 말하며, 한쪽은 소련이 미국과 대등한 세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특히 이 후자의 경우 소련이 갖춘 핵무기의 위협성을 근거로 들기 때문에 반박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미국의 기술력에 비해 소련의 그것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유럽을 점령하고도 소련이 자신의 몸집을 비정상적으로 과장되게 선전한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 팽창을 감행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모두 서로의 몸집을 때로는 과장하며, 그 긴장 상태를 지속해왔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반사이익의 달콤함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세력의 균형은 그 절대적인 양의 비등함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냉전 시스템에서는 적대적 공생의 원리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공생은 미국이 주도했으며, 독일과 베트남, 그리고 한국에까지도 적대적 공생의 원리를 적용시켰다. 



미국중심주의 신화와 대한민국의 오늘날


결론적으로는 소련의 공산주의가 미국에 의해 소비된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련이 역사적으로 정체성의 혼란과 외침(外侵)의 공포에 시달려야했던 사실을 전제로 하자.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기여한 바를 연합국에서 인정을 하고, 소련의 영토 내에서 일어났던 피해의 규모를 고려해 동유럽 국가를 완충지로 삼도록 연합국이 승인했다는 점을 짚어보아야 한다. 

물론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대한 무력 진압과 수많은 소수 민족을 탄압한 말살 행위를 역사적으로 용인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붉은 물’의 이면에는, 소련만을 ‘악마’로 상정했을 때 미국이 얻는 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에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절대적 악의 존재는 미국중심주의를 강화한다. 

데탕트(De tente, 긴장 완화)의 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를 보면 역설적으로 냉전이 두 나라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소련을 잃은 미국에게 거대한 군사력은 무명무실의 것이 되었다. 전쟁의 위협으로 세계 질서를 재패하고, 군수사업을 기반으로 몸집을 키운 미국에게, 평화는 불편한 존재였다. 평화주의를 외치던 미국의 아이러니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9.11 테러의 용의자 오사마 빈 라덴을 현상수배하는 포스터(2001).


그런 의미에서 9.11 테러가 미국에게 새로운 찬스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 및 테러 국가를 악으로 지정하는 냉전적 안보의식을 재확보한 것이다. 흑백논리를 통한 돌파구는 매우 단순했다. 그 결과 국방비가 치솟고, 오늘날까지도 그 비용이 전 세계 국가들의 국방비 전부를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무리수는 미국 내에서도 물론이고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배 하에 놓인 국가들의 공분을 사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의 금융이 주도하는 경제의 불안정성, 기독교 근본주의에 입각학 대외 정책 등이 미국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미국의 절대적 선을 의심하는 이 시점에서, 한국에 미친 적대적 공생 원리의 영향은 어떤 사회 양상을 낳고 있는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 등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를 한국이 전달받아 시민사회의 틀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친일의 잔재와 친미주의자의 권력 나눠먹기의 한계로 인해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 

미국이 자국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반공과 반테러리즘의 군사주의 카드, 즉 안보 최우선주의는 한국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빨갱이’ 알고리즘이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여전히 냉전의 시대에 머물러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탈냉전의 바다를 떠도는 냉전의 섬’. 이 상황에서 미국은 평화의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반드시 도출해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첫 번째이다. 물론 한미동맹이 전적으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당장의 실정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트럼프 정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치밀하게 짜인 전략이 필요하고, 국제외교적으로 균형 잡힌 접근이 요구될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과의 신뢰를 쌓는 것이다. 한국 내의 사드(THAAD) 배치로 인해 한중 관계가 바닥을 친 가운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엎지른 물을 담아보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미국은 끊임없이 중국을 견제하면서 우리에게 자신들의 편에 완전히 설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리를 다시 계산해볼 필요가 있다. 비록 그 관계 회복의 시간이 길지언정 북한의 핵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공조를 얻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한중 관계의 회복이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대한민국 정부가 ‘평화’를 전면적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날 강대국의 틈에서 눈치를 보며 저지른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핵 문제를 미국에게만 넘겼던 것 또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남북 갈등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한반도 내 전쟁의 가능성을 최우선적으로 우려하고 평화적 공존을 이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2017.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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